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양호 대전 (문단 편집) == 결과 == || [[파일:external/www.cultural-china.com/ba8b7a700db8a3c8d82dfedc89d265a7.jpg]][br]'''파양호 전투를 다룬 [[명나라]] [[연화]](年畵)''' || '''[[승리자|주원장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패자|반대로 진우량은 완전한 패배를 당하였다. 본인마저 죽어버린 것이다.]]''' 이후 도망쳤던 둘째 아들, 진리가 무창에서 제위를 이어받았지만, 물론 그 상태에서 제대로 세력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주원장은 직접 친정하여, 1364년, 어렵지 않게 진리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그런데 이 때 진리를 대하는 주원장의 태도는 이후 신하들을 때려잡는 것과는 사뭇 대조된다. 잘 알려졌다시피, 주원장은 자신들의 신하들에게는 엄청난 대학살을 자행할 정도로 무자비했지만 이미 완전히 패망했던 과거의 적들에게는 의외로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경우가 많았다. 이를 테면 [[나하추]]도 주원장에게 사로잡혔지만 곧 자유를 얻었으며, 용맹하게 싸우다 죽은 적 장수들에 대해, 주원장은 정중한 예로 장사를 치러주었다. 심지어, 멸망한 [[원나라]] [[순제]](順帝)의 손자인 매적리팔라(買的里八刺)가 포로로 사로잡혀오자, 많은 부하들이 그 자를 종묘에 바쳐 명나라의 위엄을 널리 알리는 퍼포먼스를 취해야 한다고 했지만, 주원장은 그 모든 제안을 거부하고 그를 숭례후(崇禮侯)에 임명하여 융숭하게 대접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집을 하사해 살게 했으며 끝내는 소종에게 되돌려 보내주기까지 했다. 진리에 대해서도, 진리가 항복하는 순간 벌벌 떨며 감히 주원장의 얼굴도 마주보지 못하자, 주원장은 그를 귀덕후(歸德侯)에 임명하여, 본래 가지고 있던 재물들을 마음대로 가지고 다닐 수 있게 하며, 직접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해주었다.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다.''' 주원장의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진우량의 아버지와 죽은 형제들에게 모두 작위를 내렸으며, 우울증에 빠져있던 진리가 무심결에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는 말을 내뱉자, >이 아이는 어린 젖먹이에 지나지 않으나, 소인들이 미혹해서 짐의 은혜를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우니, 원방에 거처하게 하는 게 의당할 것이다. 라고 하여 '''진리를 [[고려]]로 보내주는''' 상상하기 힘든 [[대인배]]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라면 중국을 떠나 머나먼 외국으로 보내는 게 좋은 일이 될 수는 없지만, 진리의 경우 주원장이 개국을 하는 도중 최대의 적이었던 진우량의 자손이며, 얼마든지 그를 죽이려 드는 사람들이 많고 자신이 살려주더라도 나중에 아들이나 손자가 이를 번복하고 죽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것은 오히려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것에 가깝다고 봐야한다.[* 당장 지금은 용서하더라도, 새로 황제가 등극하면 목이 달아나는 경우도 있다. [[옹정제]]는 모반 사건을 일으킨 증정(曾靜)이라는 인물을 관대하게 용서하였지만, [[건륭제]]는 즉위하자마자 증정을 죽여버렸다.] 심지어 [[공민왕]]에게 비단까지 주면서 진리를 좀 잘 돌봐주라고까지 했다.[* 한왕 진리(陳理)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때도 살았다. 그때 삶이 곤궁해지자, [[태조(조선)]]가 순덕후(順德候)에 봉하고 전지(田地)를 하사하였다. [[임피 진씨]](臨陂陳氏)의 시조 진여안(陳汝安)이 진리의 아들이라고 하나, 《[[태종(조선)]]실록》 18년 8월 23일 조에 진리의 처 이씨가 유일한 자식인 진명선(陳明善)이 유후사(留後司)에 갇혀있다며 선처를 호소하는 상언(上言)이 있고, 졸기에도 진명선만이 아들로 기록되었다.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5COc_A9999_1_0019175&curSetPos=0&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한국 역대 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한때 천하를 논하던 세력의 몰락 치고는 초라했달까. 진리의 후손은 [[양산시|양산]] 진씨가 되었고, 함께 온 군벌 명옥진의 아들 명승의 후손은 명씨의 시조가 되었으니 [[명계남]] 등이 그 후손이다.] 주원장 개인의 일로 말하자면, 그는 진우량을 물리친 다음해인 1364년, 이선장 등의 제안으로 오왕에 등극하였다. 이 시점에서 그는 강남을 넘어 전중국 최강의 세력자였으며, 이전의 적이었던 장사성 등도 모두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떠돌아 다니던 유민, 가족이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몰살당한 고아, 죽은 부모를 매장할 땅조차도 없는 거지. 가장 비참한 자리에서 출발했던 주원장은, 이제 파양호 대전의 승리로 수천만 중국인 중 가장 강력한 사나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368년, 드디어 명(明) 제국이 건국되었고, 그 직후 서달과 상우춘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대도(大都)를 넘어 [[몽골]]의 초원까지 진격하는 장대한 [[북벌]]에 나서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파양호 전투의 승리로 이루어진 성과인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